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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1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세 번째 읽는 작품이다. 처음 읽은 것은 2006년에 근무하던 학교도서관에서이다. 당시 전교생이 30여 명인 시골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어떤 독지가가 벽지학교 학생들의 정서를 위해서 우량도서 100여권을 기증했다. 이 책은 그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만화는 웬만하면 모두 읽을 만큼 만화광이었지만 이 책은 그리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목도 이상하고, 그림도 음울했으며, 나치 시대의 유태인의 고통을 다룬 소재에도 흥미가 없었다. 그러다 어떤 기회에 책을 펼쳤는데 그야말로 단숨에 1~2권을 완독했다. 2008년에 학교를 옮기면서 그 학교 도서관에 이 책의 비치를 신청했고, 나도 한 질을 사고 읽었다. 당시에는 리뷰를 남기지 않았으므로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 책을 펼쳤다. 그런 인연으로 읽은 이 책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몇 가지만 적어보겠다. 첫째, 나의 흐릿한 기억력에 감사했다. 두 번이나 읽었고, 그것도 아주 감동적으로 열독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처음 읽는 듯 생소함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전체적인 윤곽과 결말은 알고 있었지만 세세한 사연들은 새롭기만 했다. 흐릿한 기억력 때문에 두 번이나 느꼈던 감동을 다시 느꼈으니 망각도 감사할 일인 듯하다. 둘째, 첫 인상이 어두운 것이 아쉬웠다. 나는 이 책을 근무하는 학교의 도서관에서 두 번이나 구입했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이 책을 비치할 것을 사서교사에게 건의했던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읽기를 권했으나, 읽은 학생은 극소수였다. 그 이유는 그림체가 밝지 못하고, 또한 흑백으로 되어 있으니 학생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 듯하다. 특히 여학생들은 이 책을 거의 읽지 않은 듯하다. 유대인의 고통을 다룬 책이니 밝은 그림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좀 더 만화체로 예쁘게 그렸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쥐를 소재로 한 만화라도 미키마우스나 톰과 제리에서는 귀엽고 예쁘지 않은가 셋째, 과장하거나 각색을 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작가의 노력이 느껴졌다. 저자의 아버지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폴란드에서 함께 숨어 살던 12명의 가족 중에서 저자의 부모만 살아날 수 있었다. 저자의 형도 희생되었다. 극적으로 살아남았던 어머니는 그 후 자살을 했다. 이 작품은 저자가 아버지에게 나치시대에 유대인들이 당한 고통을 듣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저자 부자로서는 나치에게 원한이 사무쳤다고 볼 수도 있는데, 저자는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있는 사실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저자는 나치 최후의 생존자의 이야기와 그 생존자 이후에도 생존해 가는 후손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그것이 이 작품으로 하여금 1992년도 플리처 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주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누구에게 권할까 만화로서는 드물게 풀리처상을 수상할 만큼 작품성과 기록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고통을 당하기도 했던 우리 민족으로서는 동병상련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교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첫 인상이 좀 어둡고, 처음 얼마 동안은 지루할지 모르지만, 30쪽만 넘어가면 책의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의 참혹함과 그 비극의 한복판을 걸어나온 유태인의 고통스런 삶을 그린 만화이다. 유태인을 쥐로, 나치를 고양이로 상징한 이 만화는 나치의 광기어린 인종주의, 살아야 한다는 본능으로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유태인들, 그 역사의 그림자가 빚어낸 후유증을 세밀히 묘사한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이 작품을, 만화 외의 어떤 매체로도 묘사할 수 없었고 성취할 수 없었던 엄숙하리만큼 감동적인 예술 작품이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