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만이 희망이다
근본의 자리에서 묻는 변혁의 길- 박노해,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느린걸음, 2015)에서 박노해는 감옥 체험으로 빚어진 근본의 자리를 사유하고 있다. 감옥 체험은 박노해 시의 방향 전환을 이끄는 실존적 계기로 작용한다. 「인간의 기본」을 보면, 면회를 온 열정어린 청년들이 시인에게 묻는다. “선생님, 지금 가장 절실한 게 뭐예요?” 시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청년들이 스스로 대답한다. “자나깨나 혁명이란 화두이시겠지, 시대정신, 미래 진보, 희망 찾기, 맞죠?” 시인은 가만히 웃음짓다가 말없이 감방으로 돌아와선 스스로에게 되묻고 대답한다. “그래 맞아. 하지만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한 거? / 끝도 없이 걷고 싶은 거, / 걷다가 쓰러져 영영 잠들지라도 마냥 걷고만 깊은 거”. 걷고만 싶을까? 여자의 부드러운 살을 부비고 싶고, 여자의 따스한 온기가 그립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한 밥상에 둘러 앉아 오순도순 얘기하며 밥을 먹고 싶다고도 고백한다. 열정 어린 청년들이 생각하는 ‘혁명의 화두’는 ‘먹고 사는’ 인간의 기본적인 문제에 견주면 부차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혁명은 ‘먹고 사는’ 일상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실천 운동이 아닌가. 그래서 사회적 기득권과 특권을 움켜쥔 채 “도덕과 법 질서, 입만 열면 기본을 팔아 기본을 사는 / 보수 지식인들을 경계해야” 하는 만큼 “절대이념에만 목청 높이는 진보지식인도”도 경계해야 한다고 시인은 강조한다. 기본에 충실한 삶은 생활민중의 눈과 몸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생활민중은 일하는 사람들이다. “일하는 사람이 세상의 주인”(「몸의 진리」)이라는 선언은 80년대의 민중적 세계관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민중은 이념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현실 속에서 생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념으로 민중의 현실을 재단할 때, 현실세계에서 다채롭게 펼쳐지는 민중의 욕망은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실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니다. 변화하는 현실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이념이 생성될 수 있다. 혁명을 열망하는 이념인 역시 일상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오로지 혁명의 이념만을 생각하며 사는 존재는 이념적으로만 가능할 수 있을 뿐이다. 박노해는 감옥이라는 단절된 공간에서 이념인의 밑바탕에 스며들어 있는 생활인의 감각을 비로소 사유하기 시작한다. 걷고 싶은 욕망이나 여자에 대한 욕망은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욕망이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몸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표시이다. 폐쇄된 공간을 살아가는 존재에게 몸의 감각만큼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는 있을 수 없다. 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내리던 그 가을날 오후였어요경복궁 잔디밭 은행나무 아래서그대 무릎을 베고 누워 도란도란시린 하늘 맑은 햇살이 너무 부셔가늘게 눈 감고 아, 이대로 그만영영 잠들고 싶었어요긴장으로 말라가던 가혹한 불의 시절 한가운데 남아 있는 그림 같은 한때- 「내 그리운 은행나무 아래」 부분 “가혹한 불의 시절”을 견디게 한 “그림 같은 한때”의 추억은 이제는 ‘몸의 감각’으로 새겨져 있다. 몸에 각인된 ‘살아 있는 추억’은 외롭고 힘든 감옥살이를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다. 일주일의 단식 끝에, 한 수인이 살짝이 쥐어준 “노란 민들레 한 송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향기에 취하여 / 아- 산다는 것은 정녕 아름다운 것이야”(「민들레처럼」)라고 감탄하는 시인의 형상에서도 이러한 몸의 감각은 어김없이 드러난다. 생명의 향기에 취하는 ‘살아 있는 존재’가 있기에 감옥 속의 존재는 치열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단식이 길어질수록 몸은 더 예민해지지 않는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투쟁의 이면에는 이처럼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되는 삶의 내밀한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안기부의 지하밀실, “방금까지 비명 터지던 고문장에서 / 목메인 김밥을 씹어먹는” 존재는 “아영이랑 나눠먹던 그리운 김치김밥”을 떠올리며 기어코 “살아 나가자”(「눈물의 김밥」)고 다짐한다. 참혹한 고문의 순간을 이겨내는 힘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김밥을 먹던, 일상적인 기억에서 뻗어 나온다. 이념의 너머에서 빛나는 일상의 기억은 박노해의 시에 등장하는 ‘생활민중’의 실천적 삶을 이끌어내는 토대로 작용한다. 이념을 통해 실현하려 한 세상은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아직과 이미 사이」)였다. 패배의 비참함으로 절망하고 있는 순간에도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의 세상은 패배한 주체의 기억 너머에서 변함없이 되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생활민중의 시선으로 보면, 이 닦는 일 하나도 예삿일이 아니다. 첨단 생약 성분이 든 치약을 듬뿍 짜서 상쾌하고 세련된 칫솔질을 하는 대가로 우리는 “무려 다섯 드럼의 맑은 물”(「이 닦는 일 하나」)을 사용해야 한다. 이념의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소한 현실에 주목하면, 새로운 변화의 지점이 보인다. 그래서 시인은 “자연 생태와 내 몸의 원리에 맞는 방식으로 / 이를 닦기 시작”(같은 시)한다. 오른손으로 하던 칫솔질을 왼손으로 하니, 불편하긴 하지만 굳어버린 몸버릇을 바꾸고, 조급한 마음을 다스리는 효과를 경험하기도 한다. 몸은 고정된 생활을 고집한다. 몸의 감각만큼 바꾸기 힘든 것은 없다. 따라서 치열한 마음으로 몸(생활) 공부를 하지 않는 한, 생활민중의 삶은 폐쇄된 감옥에 갇힌 시인의 몸만 축나게 할 수도 있다. 이번 겨울 용맹정진을 마치자마자 그만 아파 눕고 말았어요열심도 지나치면 욕심이지요 그래요 욕심이지요열심이 제 몸의 한계를 넘어서면 끊기고 흐리고 닫히기 마련이지요 세상에 속일 수 없는 게 몸인데요내 욕심이 내 몸에 죄를 지어 아픈 이 몸에 고요히 숨 맞추고몸통하라!내 속에 막힌 봄빛 되살려 이어주시는 부드럽고 깊숙한 이 떨림- 「맑은 손길」 부분 시인은 ‘욕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열심히 하는 마음이 ‘지나치면’ 욕심이 되고, 욕심이 지나치면 몸에 죄를 짓는다. 죄를 지은 몸은 아프다. 몸속에서 펼쳐지는 “부드럽고 깊숙한 이 떨림”과 그 몸은 ‘몸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몸의 아픔은 「새벽 풍경 소리」에서도 묘사되는데, 이 시에서 ‘아픈 몸’은 역설적으로 몸 구석에서 울려나오는 “더 없이 맑고 겸허한 목소리”를 시인에게 들려준다. 몸이 상하면 ‘용맹정진’을 할 수 없다. “서둘지 말고 / 몸 상하지 말고 / 부디 살아서 정진하라”는 겸허한 목소리는 박노해가 생활민중의 감각으로 이른 “근본의 자리”(「몸 하나의 희망」)를 예시한다. 길을 잃어버린 존재에게 살아 있는 몸은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라 할 수 있다. 몸이 건강하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감옥에 갇힌 존재가 펼쳐내는 ‘건강한 몸’의 시학은 “다시 / 사람만이 희망”(「다시」)이라는 희망의 담론으로 이어진다. 희망은 건강한 ‘내 몸’에서 비롯된다. 건강한 ‘내 몸’에서 울려 나오는 희망의 노래는 박노해의 90년대 시를 80년대의 시와 결정적으로 구분 짓게 하는 시적 계기이다. 박노해는 감옥에서 생명줄을 내걸 정도로 “참혹한 투쟁과 묵상의 나날”(「줄 끊어진 연」)을 보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 처절하게 정진”(「핏빛 잎새」)하기도 했다. 근본의 자리로 내려가기 위한 치열한 정진은 ‘건강한 몸’에 대한 깨달음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밑자리에는 생활민중의 감각과 ‘몸통하려는’ 뼈아
사람만이 희망이다 단 한 문장으로 ‘시대의 화두’가 되었으며 수많은 영혼을 뒤흔든 책, 박노해의 옥중 사색 사람만이 희망이다 가 18년 만에 새로운 얼굴로 다시, 희망을 건넨다. 1997년 출간 당시 푸른 수의를 입은 ‘777번 무기수’로 수감 중이던 서른네 살의 젊은 혁명가 박노해가 세상에 던진 사람만이 희망이다 는 곧바로 전국 서점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등 30만 부 가까이 읽혀졌다.
이번 개정판은 박노해 시인이 문체를 다듬고 편집과 디자인을 변화했다. 90년대 최고의 정신적 각성의 기록 , 고민 속에 흔들리는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준 책 등의 평가를 받으며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의 말과 손으로 전해지던 사람만이 희망이다 를 새로운 감동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총 7장(아직과 이미 사이 | 길 잃은 날의 지혜 | 세 발 까마귀 | 겨울 사내 | 셋 나눔의 희망 | 첫마음 | 희망의 뿌리 여섯)으로 구성되었으며, 122편의 에세이가 실려있다. 발간 당시 함께 실린 故 김수환 추기경의 추천사와 도정일 경희대 교수의 발문은 여전히 큰 울림으로 전해진다.
희망찬 사람은 / 그 자신이 희망이다 // 길 찾는 사람은 / 그 자신이 새 길이다 // 참 좋은 사람은 /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 사람 속에 들어있다 / 사람에서 시작된다 // 다시 / 사람만이 희망이다 (「다시」) 군사정권 아래 7년여의 수배생활, 체포 후 참혹한 고문과 사형 구형 그리고 무기수로 1평 감옥 독방 속에서 보낸 7년.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꿈을 담은 사람만이 희망이다 는 길을 잃고 고민하는 이들을 위한 ‘희망의 안내서’이자, 사람에 상처받고 세상에 절망하는 그대에게 깊은 위로와 용기가 될 것이다.
이 책을 독자 여러분께 권합니다 김수환 5
序 그 여자 앞에 무너져 내리다 6
아직과 이미 사이
아직과 이미 사이 21 | 인다라의 구슬 22 | 감동을 위하여 25 | 변화 속에서 29 | 키 큰 나무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30 | 뱃속이 환한 사람 35 | 인간의 거울 36 | 겨울 없는 봄 38 | 솎아내지 마소서 41 | 두 여자가 누구게요 43 | 열리면서도 닫힌 45 | 산에서 나와야 산이 보인다 46 | 현실을 바로 본다는 것 48 | 나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50 | 손을 펴라 52 | 쉬는 것이 일이다 54 | 소걸음의 때 57 | 내 마음 그대 마음 59 | 꽃피는 말 60 | 다시 61
길 잃은 날의 지혜
길 잃은 날의 지혜 65 | 나 하나의 혁명이 67 | 몸의 진리 69 | 인간의 기본 71 | 가벼워지자 74 | 일소가 고개를 돌리듯 76 | 발 밑을 돌아보라 77 | 풀꽃의 힘 79 | 소중한 일부터 82 | 나의 고객은 누구인가 84 | 이 닦는 일 하나 86 | 어떤 밥상인가 89 | 어떻게 사느냐고 묻거든 93 | 줄 끊어진 연 95 | 첫 발자욱 98 | 내 삶 속의 삶 99 | 몸 하나의 희망 100 | 젖은 등산화 102 | 준비 없는 희망 103 | 굽이 돌아가는 길 104
세 발 까마귀
세 발 까마귀 109 | 삶의 신비 113 | 새벽 슬픔 114 | 불변의 진리 116 | 현실 공부 117 | 눈은 상식을 뚫는다 120 | 숨은 제도 122 | 부패의 향기 125 | 삼수갑산 三水甲山 126 | 그들의 실패 - 역사공부 1 128 | 머리 - 역사공부 2 131 | 째깍 째깍 째깍 133 | 역사 앞에서 134 |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웁니다 136 | 고난은 자랑이 아니다 139 | 결과에 대한 책임 141 | 적은 나의 스승 142 | 10년 후 144 | 사는 데 도움이 안 된다면 146 | 오늘은 오늘의 투혼으로 152
겨울 사내
겨울 사내 157 | 종달새 158 | 말이 없네 160 | 나는 미친 듯 걷고 싶다 161 | 새벽 풍경 소리 163 | 시린 머리의 잠 165 | 송이처럼 166 | 꽃심인가 167 | 추운 밤에 169 | 겨울 더 깊어라 170 | 핏빛 잎새 171 | 겨울이 온다 173 | 살아 돌아오너라 175 | 해 뜨는 땅으로 177 | 청산은 왜 아픈가 179 | 새야 새야 180 | 감옥 사는 재미 182 | 내 안의 아버지 183 | 천리 벽 속 187 | 실크로드에 가고 싶다 188
셋 나눔의 희망
셋 나눔의 희망 193 | 나눔과 성장 195 | 거룩한 사랑 200 | 나는 왜 이리 여자가 그리운가 202 | 지옥 204 | 맑은 손길 206 | 한 밥상에 208 | 숨은 야심 210 | 인간 복제 213 | 외계인을 기다리며 216 | 내가 보고 싶은 것들 219 | 똥배 없는 세상 221 | 용서받지 못한 자 223 | 무장無藏 하세요 224 | 몸부림 226 | 가을 물소리 228 | 부지깽이 죽비 230 | 꽃씨를 받으며 233 | 산정山頂 흰 이마 235 | 이제와 우리 죽을 때 236
첫마음
첫마음 241 | 그대 속의 나 242 | 시대 고독 244 | 한밤중의 삐삐 소리 246 | 순정한 별은 지고 248 | 편지 250 | 별의 시간 251 | 참혹한 사랑 252 | 내 그리운 은행나무 아래 254 | 그리운 여자 255 | ‘첫사랑’에 울다가 256 | 전봇대에 귀 대고 258 | 반쯤 탄 연탄 262 | 밑바닥 누룽지 265 | 무지개 266 | 별에 기대어 267 | 아름다운 타협 269 | 빙산처럼 271 | 새벽별 273 | 조건 275
희망의 뿌리 여섯
희망의 뿌리 여섯 279
한 번은 다 바치고 다시 도정일 293
박노해를 기다리며 박기호, 김진주 316